권진석
Jin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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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6
February 26, 2026

"그래서 진석님은 기획자가 되고 싶으신 거예요?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신 거예요?"
주니어 시절이던 2020년에 수차례 들었던 질문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시는 스타트업 부흥기였는데, 온갖 스타트업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개발자를 찾고 고용하는 일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돌이켜보면, 대구인난의 시대였고, 개발팀을 잘 꾸리는 CTO나 채용 매니저들이 인기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제가 소속해 있던 회사는 기술 스타트업을 표방했지만, 개발팀을 꾸릴 역량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회사였던 SI 업체와 합병했고, 그 과정에서 기획자나 디자이너도 일부 합류했습니다.
당시 저는 경험이 많은 것도, 특별히 똑똑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집착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저는 기획과 디자인의 구분이 없는 워크플로우를 추구했습니다. 저는 입사할 때 디자이너였지만, 퇴사할 즈음에는 기획자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러한 워크플로우를 추구합니다. PM/PO는 우선순위와 유저 스토리를 담은 기능 명세서를 작성하고, 디자이너는 그것을 해석해서 필요한 화면들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제 워크플로우에 확신이 들었던 건 Awair라는 스타트업에서 일한 다음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방식보다 좀 더 이상적인 환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최근 4년 정도는 디자이너가 기획한다는 방식이 제가 속한 조직에서는 자연스럽게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주니어 시절에 경험했던 일들을 다시 경험했습니다. 저는 지금 부트캠프의 프로덕트 디자인 과정 강사로 있습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취업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취업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데, 제가 속해 있는 KT테크업 과정의 특징은 최종 프로젝트에서 개발, 보안, 인프라, PM 등 다양한 직무 과정 수강생들이 함께 협업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흥미로운 건, 프로덕트 디자인 과정 안에서는 없었던 많은 종류의 갈등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프로젝트 초기에 IA와 와이어프레임을 PM과 PD 중 누가 작성해야 하는가를 두고 갈등이 생겼습니다. 어떤 조는 디자이너가, 어떤 조는 PM이 만들었고, 양쪽 모두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부트캠프 참여 전에 사회 경험이 없었던 수강생들로 구성된 조에서는 이런 갈등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반면, 회사 경험이 있는 수강생들이 모인 조일수록 이 갈등이 훨씬 잦았습니다.
앞서 제게 기획자가 될 것인지, 디자이너가 될 것인지를 물었던 그 기획자는 디자인 전공자였습니다. 학사와 석사를 모두 시각디자인으로 취득한 분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강의하는 과정의 최종 프로젝트에서도, 디자이너가 단순히 화면을 그리는 역할로만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SI 업체나 유사한 환경에서 디자이너로 일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고위드에 있을 때 저는 기획과 디자인을 함께 했습니다. 정확히는, 저는 디자인을 했는데 사람들이 저를 기획자로 불렀습니다. 그때는 디자이너의 본연의 역할을 맡는 사람이 저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경험이 쌓이고 나서 돌이켜보니 회사가 저에게 그런 역할을 특별히 주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회사가 저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어준 덕분이었습니다.
회사는 채용할 때 직무를 기준으로 사람을 뽑습니다. 그 직무에서 필요한 역할과 권한을 기술하고, 그에 맞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지만 채용된 후에는 어떤가요? 같이 일하는 동료가 됩니다. 함께 일하고 생활하면서 서로의 개인사를 하나씩 알아가고, 점점 사람 간의 관계가 되어갑니다.
직무는 그 사람을 꾸미는 하나의 단어일 뿐,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직무는 같더라도 실제로 하는 역할이 다른 경우는 생각보다 자주 있습니다. 사람마다 강점이 다르기 때문이죠.
저는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수강생들에게 나 자신을 소개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라고 주문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휴대폰이라고 팔지 않았고, 일론 머스크도 테슬라를 그냥 자동차라고 팔지 않았습니다. 만약 스티브 잡스가 휴대폰 시장 진입 자체를 목표로 삼았다면, 아이폰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노키아, 모토로라와의 경쟁에서도 밀렸을 겁니다. 테슬라가 전기모터 대신 내연기관을 선택했다면, 자동차 회사 시가총액 순위는 10년 전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 자신을 계속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직무로만 포장해서 팔려고 하는 걸까요? 나를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정의하고, 그에 맞는 역량만을 보여주는 순간, 취업 시장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미 경력 많은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직무가 아닌 나 자신을 팔아라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노동 시장에서 나를 더 비싸게 파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회사가 더 잘 되길 바라며 사람을 뽑습니다. 나 자신도 올바른 포지션에서 팔면서,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를 잘 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