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s

AI가 일하는 동안, 나는 무엇을 잃어가고 있었나

권진석

Jin Kwon

2026-05-12

May 12, 2026

빠르게 실행하는 시대, 천천히 생각해야 하는 이유

요즘 AI를 정말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주로 바이브코딩 용도인데, 하루 종일 AI에게 일을 주고 결과를 확인하고 또 다음 일을 주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어요. 짧으면 1분, 길면 10분 정도 기다리는 시간이 생깁니다. 그 시간 동안 저는 다른 AI에게 또 다른 일을 줘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맞는 건가?

AI가 일하는 동안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AI를 쉬지 않게 하려는 것이 일종의 포모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AI가 멈추면 내가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요. 그래서 끊임없이 다음 일을 찾아 넘기게 됩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체계가 없다는 거예요. PM 스킬 중에 MoSCoW라는 게 있습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인데, 비즈니스 목표와 가까운 일일수록 높은 우선순위를 매기는 방식이에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충분히 고민하기 전에 실행부터 하게 됩니다. 일을 마치고 나면 사실 필요 없는 것이 나오는 경우가 생겨요. 바이브코딩을 열심히 마쳤는데 정작 운영할 수 없는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빠르게 만들었지만,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먼저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무슨 일을 하든 먼저 문서를 작성했어요. 작성된 문서들 중에서 실제로 실행하는 건 많지 않았지만, 쓰고 퇴고하고를 반복하는 그 과정에서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요즘은 그 과정이 사라졌어요. 문서를 쓰지 않고 다짜고짜 AI에게 채팅을 합니다. 결과물은 빠르게 나오는데,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요.

회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AI도 마찬가지다

저는 회의를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의에서 깊이 있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잘 없거든요. 회의는 아이데이션 과정이에요. 진짜 일은 아이데이션 이후에 발생합니다. 상상하는 것이 일이 아니라, 상상한 것을 실현하는 게 일이에요.

AI를 통해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몰입해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딥워크』라는 책이 저에게 큰 깨달음을 준 책입니다. 주변 환경을 차단하고 일에 몰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해준 책이에요. 회의실에서 대화하는 것, 슬랙에서 답변하는 것, AI에게 일을 넘기는 것. 이 모든 것이 일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그 순간 몰입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몰입하지 않은 일의 결과물은 대부분 그다지 새롭지 않아요.

AI가 대신할 수 없는 것

AI를 활용하면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항상 그렇진 않습니다.

사업의 진짜 본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고, 가보지 않은 길에 팀을 이끌고 가는 일이에요. 일에 몰입한다는 건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길을 고민하다가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는 것입니다. AI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AI는 지금 받는 질문에 응답하는 것만 합니다. 어제 답변할 때 고려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오늘 스스로 가져오지 않아요. AI의 답변은 확률을 기반으로 생성되기 때문에, 과거에 없던 답을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몰입해서 고민하다 찾아내는 실마리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증명하는 것은 결국 사색이라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문제를 풀려 하는가. 그 생각의 흔적이 곧 내가 여기 있다는 증거입니다.

AI는 사색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받으면 답을 내놓지만, 스스로 고민하거나 방황하거나 막힌 길 앞에서 멈추지 않아요. 그 사색의 자리는 여전히 사람의 것입니다.

AI를 쉬지 않게 하는 것이 곧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착각. 빠르게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는 착각. 저는 요즘 그 착각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맥락을 이해하는 시간,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잡고 앉아 있는 시간. 이것들이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사실 가장 대단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AI가 쏟아내는 결과물 속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건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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